임신 중 우울증 약을 먹으면 태아에게 자폐증이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던 예비 부모들에게 안도감을 주는 대규모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임신부의 항우울제 복용 자체가 아이의 자폐나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ADHD) 발병 위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원래 앓고 있던 우울증 등 정신 건강 상태와 유전적 요인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홍콩 대학교(University of Hong Kong) 연구진은 최근 의학 학술지 란셋(Lancet)을 통해 2천5백만 건 이상의 임신 사례를 다룬 37개의 개별 연구를 종합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초기 데이터에서는 임신 중 항우울제를 복용한 여성의 아이가 자폐증이나 ADHD 진단을 받을 확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연구진이 가족의 신경 발달 장애 병력이나 어머니의 기존 정신 건강 상태 등 다른 변수들을 고려하자 약물 복용과의 연관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임신부가 약을 먹지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우울증 약을 복용한 경우 아이의 자폐증 및 ADHD 진단 확률이 동일하게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약물의 화학적 성분이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정신 건강 질환이 유전적 연결 고리를 통해 아이에게 전달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드렉셀 대학교(Drexel University)의 브라이언 K. 리(Brian K. Lee) 교수는 가족력에 있는 정신 건강 상태가 자폐증 발병 위험과 통계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임신부들의 항우울제 공포는 지난 2015년 발표된 캐나다의 한 연구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당시 임신 후기에 특정 항우울제를 복용한 여성이 자폐아를 낳을 확률이 두 배 높다는 결과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예비 부모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의 캐스린 에릭슨-리다웃(Kathryn Erickson-Ridout) 박사는 과거의 연구들이 임신부의 우울증 자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하며, 중증 우울증에서 손상되는 생물학적 경로가 자폐증 발병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우울증 약을 갑자기 끊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경고한다. 현재 미국 내 임산부 사망 원인 2위가 자살일 정도로 임신 중 정신 건강 관리는 생명과 직결된 중대한 문제다. UCLA 모성 정신 건강 프로그램의 케이티 언버퍼스(Katie Unverferth) 박사는 임신이라는 불안한 시기에 약물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이번 연구가 임상 지침에 따라 안전하게 치료를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과학적 근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