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국무부·의회 등 미국 전역서 한국 민주주의 위기 지적… “한미동맹은 민주주의 가치 공유가 핵심”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위태로워졌다는 우려와 함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비판이 미국 정·관계에서 잇따랐다. 특히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한국이 사전 협의도 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에 대해 백악관과 국무부가 이례적으로 강경한 톤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백악관은 계엄령 선포 직후 “한국 정부와 연락 중이며 상황을 긴밀히 모니터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은 한국 시간 2시 24분경 “한국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막 받고 있다”고 밝히며, “계엄령 선포에 대해 사전에 통지받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이는 한미 간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미국 국무부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커트 캠벨(Kurt Campbell) 부장관은 비상계엄 선포를 두고 “중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윤 대통령이 심하게 오판했다”고 직접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는 계엄령을 “매우 문제가 있고 위법적”이라고 평가하면서, “과거 계엄 경험에 대한 기억이 한국에 깊고 부정적인 울림을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베단트 파텔(Vedant Patel) 국무부 부대변인은 “계엄령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하면서, “민주적 시스템과 민주적 절차가 승리할 것을 기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특히 그는 “한미동맹은 특정 대통령이나 정부를 초월한 파트너십”이라고 언급해 주목을 받았다.
미 의회에서도 강력한 비판이 이어졌다. 브래드 셔먼(Brad Sherman) 하원의원은 본회의장 연설에서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자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한 전 세계의 노력에 대한 모욕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도 “계엄 선포는 명백한 실수이자 해로운 행동”이라며 “윤 대통령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앤디 김(Andy Kim) 하원의원은 성명을 통해 “국회가 비상계엄령을 뒤집기로 한 결정은 갈등을 축소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며 “계엄령 선포는 국민의 근본적인 통치 기반을 훼손하고 국가의 취약성을 극적으로 높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직 주한미국대사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캐슬린 스티븐스(Kathleen Stephens), 해리 해리스(Harry Harris), 토머스 허버드(Thomas Hubbard) 전 대사는 한국이 민주주의의 모범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계엄령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이번 사태는 한미 간 주요 외교 일정에 연쇄적인 차질을 빚었다. 로이드 오스틴(Lloyd Austin) 국방장관의 방한이 연기됐고, 4~5일로 예정됐던 핵협의그룹(NCG) 회의와 도상연습도 미뤄졌다.
더욱이 12월 12~13일 워싱턴 DC 국무부 청사에서 개최 예정이던 ‘한미일 여성 경제역량 강화 콘퍼런스’도 돌연 무기한 연기됐다. 이 행사에는 3국의 정부 당국자와 재계 인사, 비정부기구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다. 주최 측인 미 국무부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unforeseen circumstances) 때문에 회의가 연기됐음을 알리게 되어 유감스럽다”고만 밝혔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참석자 섭외 과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연기가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으나, 구체적인 연기 사유가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인지는 공식 확인되지 않았다.
토니 블링컨(Tony Blinken) 국무장관은 나토 외교장관회의 후 “한국의 민주주의 발현과 민주적 회복성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례”라고 평가하면서도, 윤 대통령의 계엄령 해제를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미국의 소리(VOA)는 대통령의 권한을 국민의힘에 양도하는 절차와 법적 근거에 대해 대통령실에 질의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언급하며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를 거론한 것은 이번 사태가 단순히 한국 내부의 정치적 문제를 넘어 글로벌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의 이 같은 반응은 한미동맹이 단순한 군사동맹을 넘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공동의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동맹국 간의 소통 부재와 일방적인 계엄령 선포가 얼마나 심각한 외교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